“열이 며칠째 39도를 넘는데, 해열제를 먹어도 그때뿐이에요.”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단순한 감기몸살인 줄 알았는데, 좀처럼 차도가 없어 병원을 찾았다가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HLH)’이라는 생소한 병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인에게 발생하는 HLH는 매우 드물지만, 한번 발생하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으로도 알려진 이 질환은 면역세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정상 세포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현상입니다. 오늘은 실제 성인 HLH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이 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치료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찾아온 위기, 60대 남성의 HLH 진단기
코로나19 감염 이후에도 고열과 전신 쇠약감이 계속된다면, 단순한 후유증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음은 코로나19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HLH를 진단받은 61세 남성의 사례입니다.
단순 폐렴인 줄 알았지만… 끝나지 않는 고열
A씨(61세, 남성)는 5일간 지속된 발열과 근육통으로 병원을 찾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폐렴 진단 후 입원 치료를 시작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해열제와 항바이러스제(렘데시비르), 스테로이드(덱사메타손)를 투여했음에도 38.6도를 넘나드는 고열은 계속되었고, 입원 3일째부터는 산소 요구량까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폭발적으로 치솟은 수치, HLH를 의심하다
의료진은 환자의 상태가 일반적인 코로나19 폐렴 환자와 다른 양상으로 악화되자 추가적인 혈액 검사를 시행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염증 상태를 보여주는 페리틴(ferritin) 수치가 1,936ng/mL에서 22,986ng/mL로 무려 10배 이상 폭증한 것입니다. 동시에 혈소판 수치는 114,000/mm³에서 63,000/mm³으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 검사 항목 | 입원 초기 | 입원 3일째 | 정상 범위 |
|---|---|---|---|
| 페리틴(Ferritin) | 1,936 ng/mL | 22,986 ng/mL | 30-400 ng/mL |
| 혈소판(Platelet) | 114,000/mm³ | 63,000/mm³ | 150,000-450,000/mm³ |
| 백혈구(WBC) | 2,050/mm³ | 2,340/mm³ | 4,000-10,000/mm³ |
멈추지 않는 고열, 급격한 혈소판 감소, 그리고 폭발적인 페리틴 수치 증가는 HLH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소견이었습니다. 의료진은 즉시 골수 검사를 진행했고, 골수 내에서 다른 혈액 세포를 잡아먹고 있는 비정상적인 면역세포(혈구탐식 소견)를 확인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코로나19에 의한 이차성 HLH로 확진했습니다.
스테로이드 치료 후 극적인 회복
진단 즉시 고용량 스테로이드(메틸프레드니솔론 1g/일) 집중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치료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치료 시작 3일 만에 환자의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폭등했던 페리틴 수치는 2,298ng/mL로 안정되었습니다. 바닥을 보였던 혈소판 수치 역시 126,000/mm³으로 회복세를 보이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례는 감염병이 어떻게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교란시켜 HLH라는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조기 진단과 신속한 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감기몸살로 착각하기 쉬운 증상, 30대 남성의 EBV 관련 HLH
성인 HLH는 코로나19 같은 특수한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흔한 바이러스 감염 후에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키스병’으로 알려진 전염성단핵구증의 원인인 엡스타인-바 바이러스(EBV)가 대표적입니다.
2주간의 고열과 피로감, 범인은 흔한 바이러스?
B씨(30대 후반, 남성)는 약 2주간 지속되는 고열과 심한 근육통, 피로감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동네 의원에서 감기몸살 약을 처방받고 코로나 검사도 받았지만 모두 음성이었고,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대학병원 내원 당시 시행한 혈액검사에서 백혈구, 혈색소, 혈소판이 모두 감소한 범혈구감소증과 함께 간수치 상승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페리틴 수치는 10,000ng/mL을 훌쩍 넘는 비정상적인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골수 검사로 확진, 표준 치료를 시작하다
단순 감염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검사 결과에 의료진은 HLH를 의심하고 복부 CT와 골수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CT에서는 비장이 커져 있는 소견(비장비대)이, 골수 검사에서는 혈구탐식 소견이 명확히 관찰되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추가 검사에서 엡스타인-바 바이러스(EBV) 감염이 확인되었고, 최종적으로 EBV 관련 이차성 HLH로 진단되었습니다.
항암제 병행 치료로 되찾은 건강
B씨의 치료는 HLH의 국제 표준 치료법인 ‘HLH-94 프로토콜’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스테로이드(덱사메타손)와 항암제(에토포사이드)를 함께 투여하여 과도하게 활성화된 면역체계를 강력하게 억제하는 치료법입니다.
치료 시작 후 일주일이 지나자 39도를 넘나들던 고열이 잡히기 시작했고, 환자의 전신 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한 달 후 추적 검사에서는 페리틴 수치가 1,000ng/mL 이하로 감소했으며, 모든 혈구 수치가 정상 범위로 회복되었습니다. B씨는 총 8주간의 초기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현재 재발 없이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희귀하지만 알아야 하는 질환, HLH를 기억하세요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성인 HLH는 감염, 악성 종양, 자가면역질환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촉발될 수 있으며 초기에는 감기나 폐렴 같은 일반적인 질환과 구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면 한 번쯤 HLH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해열제로도 조절되지 않는 38.5도 이상의 고열이 1주일 이상 지속될 때
- 혈액 검사에서 원인 불명의 혈구 수치 감소(특히 혈소판)가 나타날 때
- 페리틴(ferritin)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을 때 (보통 500 ng/mL 이상)
HLH는 진단이 늦어지면 사망률이 매우 높은 무서운 질환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기에 정확히 진단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신속하게 시작한다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합니다. 끝나지 않는 열과 싸우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혈액내과 전문의를 찾아 정밀한 진단을 받아보시길 바랍니다.